⌂ 말과 글의 집.
나와 여러 사람의 말과 글을 가리어 모아 엮음.
재와 사랑의 미래
241014 01:34
그런 때라 어려운 시집이다. 1부 첫 시 첫 구절을 옮기는 내가 우습다. 「긴 초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타는 냄새.

모든 것은 빛에 대한 정보의 빈약에서 비롯된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솟고 다르게 깎이는 얼굴처럼
그중 몇 개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김연덕, 「긴 초들」,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2021), p. 7
책 형태에 관한 책
241001 23:52
되돌아보니 우리는 아마도 과도하게 열정적인 해석을 하는, 즉 예술가와 경쟁하려고 시도하는 잘못을 여기서도 범했던 듯하다. 그런 접근법은 예술이 책을 통해 스스로 이야기하게 두기보다 책 자체를 예술품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과잉 해석을 인지하는 게 반드시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객관성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가에 대해 2차적인 짐작을 피하는 사려 깊은 접근법을 의미한다. 내용과 자료를 균형 있게 해석하고 결합하면, 결과물은 부분의 합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 자르고 붙여서 모방하기보다는, 일종의 우아한 연금술로 주어진 자료를 변형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제임스 고긴, 「마타클락 콤플렉스: 재료, 해석, 디자이너」, 『책 형태에 관한 책』, 사라 드 본트, 프레이저 머거리지 편, 안그라픽스(2023), p. 40–41
하필 책이 좋아서
240824 22:25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단계로 나눈다면 첫 단계는 차이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하필 책이 좋아서』, 북노마드(2024), p. 94

디자인 저술가 엘런 럽튼(Ellen Lupton)은 「책의 몸」이라는 글에서 책과 타이포그래피 관련 용어에 몸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글쓰기가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책, p.95
하필 책이 좋아서
240819 00:29
생각해 보면 쓰기에 능한 사람들이 말하기에 능할 수도, 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재밌다. 머릿속이 빠른 냇물처럼 흐르는 이도 있고, 고인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도 있는 게 아닐까?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하필 책이 좋아서』, 북노마드(2024), p. 37
아나 바즈
240805 02:25
더운 날 S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 섹션을 관람하였다. 작가 아나 바즈 인터뷰 발췌문 한글 번역.

실험영화는 영화의 미래를 향하기 때문에 영화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영화가 그 자체의 구조를 해체, 파괴, 파편화하여 끊임없이 관객에게 상기하려는 것은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이것은 소비주의적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소위 상업영화라 불리는 극단적 식민 산업을 넘어선다. 영화는 소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인식의 변형이며 곧 시간과 공간이다.

아나 바즈, 바바라 베르가마쉬 노바에스, 〈포스트 식민주의 영화 풍경―아나 바즈와의 대화〉, 《예술에서의 과학과 기술》, 제13호, 3호(2021), p. 153
퍼펙트 데이즈(2023)
240728 14:16
히라야마는 생활에 익숙하게 움직인다. 일과 중 발생하는 크고 작은 균열은 그가 필름 카메라로 포착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닮았다. 비슷한 날들은 결코 같은 날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수행적 삶은 곧 장소에 녹아든 삶이라 떠도는 중에 보기에 무척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