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과 글의 집.
나와 여러 사람의 말과 글을 가리어 모아 엮음.
재와 사랑의 미래
241014 01:34
그런 때라 어려운 시집이다. 1부 첫 시 첫 구절을 옮기는 내가 우습다. 「긴 초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타는 냄새.

모든 것은 빛에 대한 정보의 빈약에서 비롯된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솟고 다르게 깎이는 얼굴처럼
그중 몇 개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김연덕, 「긴 초들」,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2021), p. 7
몸의 습관
241014 00:52
어느 새벽엔가 H에게 기대고 말았다. 여름내 마음 빚을 진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놓고 훌쩍 떠나와 버린 거다. 몸은 몸의 습관을 들여야지, 몸에 마음의 습관을 들이면 몸이 마음을 못 좇아가서 지치더란다. 그러게, 어르고 달랠 것투성이다. 가꾸어야 할 것들조차 성가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주변에 나눌 만큼의 따뜻함을 간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디폴트가 얕은 음수에서 더한 음수일 때더라도, 그저 조금 평화롭기가 어려워진 때더라도 말이다.
책 형태에 관한 책
241001 23:52
되돌아보니 우리는 아마도 과도하게 열정적인 해석을 하는, 즉 예술가와 경쟁하려고 시도하는 잘못을 여기서도 범했던 듯하다. 그런 접근법은 예술이 책을 통해 스스로 이야기하게 두기보다 책 자체를 예술품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과잉 해석을 인지하는 게 반드시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객관성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가에 대해 2차적인 짐작을 피하는 사려 깊은 접근법을 의미한다. 내용과 자료를 균형 있게 해석하고 결합하면, 결과물은 부분의 합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 자르고 붙여서 모방하기보다는, 일종의 우아한 연금술로 주어진 자료를 변형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제임스 고긴, 「마타클락 콤플렉스: 재료, 해석, 디자이너」, 『책 형태에 관한 책』, 사라 드 본트, 프레이저 머거리지 편, 안그라픽스(2023), p. 40–41
묵념
240928 01:28
이웃집 가스 누출 때문이든, 그래서 열어 둔 창 밖에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음 때문이든 쉽게 잠들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이 그날인가, 중요하지 않다. 미세한 진동. 행위예술가는 말했다. 무언가를 우선순위에 두는 용기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이 나를 더 나은 나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에 관하여. 오래전 읽은 책에서, 현대의 시간은 원자화되어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지 않고 무수한 현재로서만 존재한다 했다. 더는 점과 점 사이를 잇지 않아도 된다니 큰 수고를 덜었다. 잇고 싶지 않은, 혹은 이을 수 없는 점들이 많은 탓이다.
나무
240908 22:58
나무는 미술관과 주차장 사이에 서 있다. 키가 큰 바람에 가지가 닿는 높이마다 잎이 다–다른 색으로 비친다. 가만히 있으니 내가 가서 안아야 하지만, 안기는 기분도 드는 법이다. 오늘 글쎄 반의 반 정도 안을 수 있었다. 껍질이 거칠어서 올이 뜯기는 듯 몸이 당겨지는 긴장이 나쁘지 않았다.

문득 이번 학기에 듣는 크리틱 수업 내용의 일부가 떠오른다. 브라이언 브레이보이에 따르면 미학이란: 공동체가 선하고, 진실하며, 옳고, 아름답다고 결정하는 것.
하필 책이 좋아서
240824 22:25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단계로 나눈다면 첫 단계는 차이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하필 책이 좋아서』, 북노마드(2024), p. 94

디자인 저술가 엘런 럽튼(Ellen Lupton)은 「책의 몸」이라는 글에서 책과 타이포그래피 관련 용어에 몸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글쓰기가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같은 책, p. 95
하필 책이 좋아서
240819 00:29
생각해 보면 쓰기에 능한 사람들이 말하기에 능할 수도, 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재밌다. 머릿속이 빠른 냇물처럼 흐르는 이도 있고, 고인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도 있는 게 아닐까?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하필 책이 좋아서』, 북노마드(2024), p. 37
반쯤 열린 문
240818 23:58
Y는 이곳이 반쯤 열린 문이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 남기기로 했다. 최근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 책에 대한 책이라 Y에게 듣게 되는 것이 많아 즐겁다. 텍스트가 이미지의 각주가 되는 것, 이미지가 텍스트의 도판이 되는 것. 이러한 관계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것을 신중하게 조율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상기하게 되었다.
이곳은
240815 03:48
흩어진 글을 모으는 공간이다. 글은 대부분 메모 어플에, 가끔 보낸 편지함에, 어쩌다 공책에 있다. 이것을 다듬어 말하기·듣기·쓰기·읽기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업로드한다. 분류는 거칠다. 글이 더 쌓여 흐릿한 기준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찌저찌 이곳을 짓고 있다. 특정 기능들이 크롬에서 묘하게 늦게 적용되는데 왜 그런 건지 도통 알 수 없다. 그래도 위계와 그리드라 좋다. 무엇이 될지 모르면서, 모인 것들이 어떤 면을 내비치게 될지 미지수인 상태라 좋다.
아무개, 아무개 씨, 아무개 님
240810 03:54
자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 여름에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나는 끝에,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이름을 열거할 거란 걸 안다. 입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사람, 어떤 날을 뒤적이느라 눈동자를 떨어트리는 사람. 나는 이러저러한 말을 가만히 듣다가 누군가 반짝일 때 같이 반짝였다. 그냥 읽히는 글을 쓰는 날이면 좋아요. 옷걸이에 안타까운 걸 걸어두고 밖으로.
아나 바즈
240805 02:25
더운 날 S와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 섹션을 관람하였다. 작가 아나 바즈 인터뷰 발췌문 한글 번역.

실험영화는 영화의 미래를 향하기 때문에 영화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영화가 그 자체의 구조를 해체, 파괴, 파편화하여 끊임없이 관객에게 상기하려는 것은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이것은 소비주의적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소위 상업영화라 불리는 극단적 식민 산업을 넘어선다. 영화는 소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인식의 변형이며 곧 시간과 공간이다.

아나 바즈, 바바라 베르가마쉬 노바에스, 〈포스트 식민주의 영화 풍경―아나 바즈와의 대화〉, 《예술에서의 과학과 기술》, 제13호, 3호(2021), p. 153
유가족
240731 07:41
내 이름이 장례 안내문 유가족란에 쓰여있었다. 어떤 말은 경험해서만이 뜻이 온전해진다. 유가족이란 장례식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모르는 순간의 당신이 그에게 남아있다. 조각들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퍼펙트 데이즈(2023)
240728 14:16
히라야마는 생활에 익숙하게 움직인다. 일과 중 발생하는 크고 작은 균열은 그가 필름 카메라로 포착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닮았다. 비슷한 날들은 결코 같은 날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수행적 삶은 곧 장소에 녹아든 삶이라 떠도는 중에 보기에 무척 부러웠다.
빨래
240725 01:30
언니는 회화가 빨래 같은 거라 했다. 편집된 시간을 모으면 어떤 궤적이 보인다고. 이미 그려진 이미지에 천천히 뜻이 맺히기도 한다고 했다. 마시다 만 밀키스와 피우다 만 연초가 종이컵에서 만났다.
꿈1
240722 18:04
당신과 나는 아주 오랜만이다. 찰랑이는 흰 벽지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있다. 아래, 발목이 보일 만큼의 틈이 있다. 장난스레 당신의 발끝에 내 발끝을 갖다댄다. 놀랍지 않다. 당신은 내가 나임을 알아차린다. 놀랍지 않다. 슬쩍 가파른 입꼬리. 나눈 시간은 나누지 않은 시간을 초월한다. 다행이라 여긴다.
J에게 답신 발췌
240718 03:09
특이하게 요즘의 밤은 아침보다 저를 더 낙천적이게 하고, 그래서 막연히 평화가 다가오고 있다 느끼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날에 만나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싶고, 말을 쏟아내기도 하고, 갑자기 멈춰 침묵을 즐기고도 싶고 그래요. 오랜만이라 미묘하게 달라진 저를 알아채 주고 그럼에도 그대로인 저 또한 발견해 주세요.
J의 편지 발췌
240714 23:19
문장을 좋아하냐는 말을, 선영에게 어떤 말로 다르게 말할 수 있을까요.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제가 선영을 잘 모르나 봐요. ‘문장’을 ‘책’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책을 좋아하세요?’는 너무 뭉툭하게 느껴지네요. 다음에 만나면 선영이 어느 순간이 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걸 알려주세요. 미세한 차이를 커다란 차이로 느끼는 어떤 것을.
Y의 편지 발췌
240518 20:46
메리 올리버는 삶의 대부분을 자연 속에 살며 작업한 시인이야. 산문집 『긴 호흡』에서 풍경을 그려내는 사색 틈틈이 예술에 대해 말하는데(여기에서의 예술은 아마 시겠지.) 문장에서 보이는, 환상이나 우러름 없는 경외와 애정이 좋더라. 나는 마음의 건강을 향하는 애정이 예술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태도에 늘 감명받나 봐. 지난겨울에 읽은 책 중에 제일 좋았어. 나도 항상 선영의 안녕을 바라. 이미지, 글, 문장, 시간, 디자인⋯.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이 마음의 행복을 향해 있기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